한국의 전통은 남녀평등이었다.
  글쓴이 : 상담소     날짜 : 13-02-13 16:13     조회 : 2785     트랙백 주소

한국의 전통은 남녀평등이었다.

                             정긍식 서울대 법대 부교수

 

15세기에 들어온 중국식 가부장제가 식민시대 거치며 제도와 규범으로 굳어져 원래는 상속·제사·족보에서 남녀와 친가·외가 차별 없고 차가살이가 일반적 풍속 여성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신장시키기 위해 법무부에서는 남편이 사망하였을 때 재산의 절반을 부인에게 주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는 남녀평등과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평등을 기초로 한다는 헌법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이다. 2005년 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함께 호주제를 폐지하였다. 또 1년 전 ‘딸들의 반란’ 사건에서 대법원에서는 여성의 손을 들어주어 여성에게도 종중원(宗中員) 자격을 인정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의 전통에 맞지 않는다”는 여론과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사회가 가부장제였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 내지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때로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한국사에 가부장제가 형성되는 계기는 15세기 주자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수용이다. 이로써 가부장제의 이념적 틀이 마련되었고,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주자가례의 실천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결정적 계기는 식민지 지배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상은 굳이 따지자면 100~200년 정도의 짧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 중국 사회에서 여성은 두 번 출생한다. 여성은 혼인으로 사회적으로 출생하며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된다. 맹자(孟子)가 말했듯이, 여성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남자 가문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부속된 채로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을 따르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미덕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중국과는 달랐다. 여성에 대한 제약이 별로 없는 고려의 분위기는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 고대를 이상으로 삼고 사회를 변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변혁의 도구로 주자가례를 활용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규정한 주자가례는 가정의 일상생활에서 가부장제를 실천하는 매체였다. 이러한 개혁은 기존의 풍속과 마찰을 일으키며 또 어느 정도 변용되면서 한국 사회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시집살이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시집살이가 아닌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혼속(婚俗)이었다. 남자들은 외가에서 자라 장가를 가 처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장가든 사람이 처가 피붙이들과 잘 지내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다. 신랑은 처가 사람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더욱 가깝게 된다. 이는 ‘신입생 환영회’이다. 요즘 결혼식 피로연에서 친구들이 신랑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이러한 혼인풍속은 16세기에 접어들어 바뀌기 시작하였다. “처가살이하는 것은 남녀의 질서,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고유의 풍속이라는 반론 역시 강하였다. 결국 타협책으로 장가를 가서 일정기간 동안 처가에 머물렀다. 후대로 올수록 그 기간이 단축되었다. 처가살이하는 혼인풍속은 남녀평등의 사회적 여건을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신혼여행 후 처가로 돌아와 며칠을 지낸 후 시집으로 그리고 그들의 보금자리에 둥지를 튼다. 1990년부터 상속에서 아들과 딸의 차별은 없다. 그러나 1960년에는 딸은 아들의 절반만을 상속 받았다. 이렇게 되는 데 30년이 걸렸다. 그 결과는 15세기로 돌아갔다. 1485년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아들과 딸이 부모의 재산을 같이 상속 받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다만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자에 대해서는 5분의 1을 더 주는 등 약간 우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문서를 작성하였다. 노비는 성별과 나이, 건강상태를, 토지는 면적과 지역, 비옥도를 고려하여 분배하였다. 이는 형식적인 균분상속(均分相續)이 아니라 실질적인 균분상속이다. 이는 법적으로도 강력하게 보호를 받아 제 몫을 받지 못한 상속인은 소송으로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남녀 균분상속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우리와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16세기까지는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조상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친손(親孫)만이 아니라 외손까지 제사를 지냈고, 심지어 남편이 죽은 후에 아내가 망부(亡夫)만이 아니라 시집의 제사까지 모셨다. 물론 경국대전에는 맏아들이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규정하였지만,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는 처가살이하는 혼인풍속으로 아들과 사위, 그리고 친손과 외손이 정서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남녀 균분상속이므로 아들과 딸이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으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의식하였다. 처가살이 혼속에 터잡아 남녀 균분상속과 제자녀윤회봉사(諸子女輪回奉祀·여러 자녀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받드는 것)가 관행으로 남녀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만큼 조상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민족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는 족보(族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대 족보에는 부계조상에서 부계손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딸은 본인이 아닌 사위와 그 아들, 즉 외손만 족보에 올리고 또 나이와 관계없이 아들이 먼저, 딸은 다음에 기재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정반대이다. 1476년의 안동 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에는 안동 권씨만이 아니라 그들과 혼인관계가 있는 모든 집안의 후손을 전부 기재하였다. 그래서 사위와 외손만이 아니라 외손의 외손, 그 외손의 외손까지 모두 기재하였고 또 출생순서대로 자녀를 기재하였다. 이러한 기재방식은 1600년의 퇴계 이황 집안인 진성 이씨(眞城李氏)의 족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우리는 혈연관념에서 부계와 모계, 친손과 외손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남녀평등의 관념은 호적에서도 드러났다. 조만간 바뀔 것이지만, 현재까지 호적은 부계로 이어지는 호주를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그래서 한 돌도 되지 않은 아들이 어머니와 누이를 제치고 호주가 되기도 하였다. 국가에서도 남성·남편 중심이 아닌 부부 중심의 호적제도를 운영하였다. 전통적 호적기재양식은 4조호구(四祖戶口)이다. 이는 자기의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와 처의 4조를 동시에 기재하였다. 법전에는 호주(戶主)라는 용어는 없으며 실제 호주라는 말이 쓰여도 이는 국가에 대해 공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 요즘과 같이 가족을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다. 남녀평등적 호적은 1909년 통감부 주도로 민적법(民籍法)이 제정되면서 사라졌다. 민적법에서는 남성만이 될 수 있는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 호적령을 거쳐 현재의 호적법까지 연결되는 현 호적제도의 모태이다. 16세기까지 여성은 가정에서 거의 차별을 받지 않은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17세기 이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사화(士禍)를 겪은 사림(士林)은 향촌(鄕村)에서 주자학의 이념과 주자가례를 몸소 실천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따른 명분론(名分論)의 강화는 주자가례에서 표방하는 가부장적 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그리고 향촌사회에서 양반층의 분화는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가부장제를 강화하였다.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기간이 줄어듦에 따라 서서히 내외(內外)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친가와 외가를 구분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인정도 줄어드는 것은 인지상정. 내외관념은 제사승계와 재산상속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669년 전라도 부안의 김명열의 유언에는 변화의 사정이 잘 드러난다. 그는 자녀윤회봉사가 관례이지만 예법에 맞지 않으며 또 사위나 외손이 장인이나 외조부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시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예법에 맞고 또 정성스러운 제사를 위해 외손 등이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대신 딸은 재산을 아들의 3분의 1만 상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딸이 제사에서 배제됨과 동시에 상속에서 차등을 받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사는 경제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귀찮다. 한편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제사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여럿이 제사를 지낼 책임을 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래서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지 않거나 심지어 빠뜨릴 우려도 있다. 방법은 하나다. 제사가 영속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특정 후손, 곧 종손(宗孫)에게 제사의 책임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결국 종손이 아닌 후손은 상속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제사의 부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조선 양반의 기본덕목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다. 즉 조상제사를 잘 받들고 손님 대접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방편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부자이어도 몇 대 동안 모든 아들·딸에게 재산을 고루 나누어주면 가문 전체가 가난을 면할 수 없다. 향촌에서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모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종손 등에게만 재산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지손(支孫)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종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특히 명분론의 강조는 큰집과 작은집, 종손과 지손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 종손은 한편으로는 후손을 대표하여 조상을 모시는 의례의 주체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강력한 존재였다. 그리고 조상의 제사를 강조함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아들이 중시되었다. 딸은 부차적인, 여성은 도구적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삶의 터전인 혼속의 변화는 인간관계를 바꾸었다. 이에 따라 외손봉사(外孫奉祀)가 부정되고 여러 아들이 제사를 돌려가면서 모셨고, 상속에서 여성이 차별을 받았다. 그리고 향촌사회에서 가문이 중시됨에 따라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차별상속으로 갔으며 그 대가로 제사는 종손이 단독으로 모셨다. 이렇게 되자 가문에서 종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더욱 높아져 사실상 가부장제가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조선 후기에 이미 가부장제는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경험은 여전히 중요하다. 호주제를 도입하고 호주가 일단 모든 재산을 상속한 다음, 다른 자는 그에게 재산을 나누어줄 것을 부탁하는 등 가부장제를 제도적으로 강화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의 가부장제를 규범으로 각인시킨 점이다. 조선시대의 가부장제는 사실일 뿐, 규범과 제도는 아니었다. 사실은 피할 수 있지만 규범은 그렇지 않다. 규범과 제도는 사람이 반드시 가야 하거나 편히 갈 수 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잘 닦여진 신작로로 다녔다. 그리고 그 길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긍식 서울대 법대 부교수